Page 5 - Why? 피플 No.31 /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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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세상을 변화시키는 학문, 실학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국토를 휩쓸고 간 17세기 후반, 사
회와 경제는 파탄에 직면했다. 그러자 높은 이상만 추구하
는 성리학 대신 백성의 삶을 보다 이롭고 풍요롭게 하는
학문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졌다. 즉 현실과 동떨어진 이론
보다는 실생활에 이용할 수 있는 학문인 실학이 주목받게
된 것이다. 실학은 현실에서 의미를 찾고, 실생활에 활용
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학문이었다. ‘털끝 하나인들 병
들지 않은 분야가 없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
는 반드시 망하고 만다.’라고 한 정약용은 평생 실학 정신
과 함께했다. 수원 화성을 쌓고, 홍역 치료법을 연구하고,
거중기 등을 발명한 그는 수많은 글을 통해 현실의 불합리
한 점을 비판하고 백성의 평화롭고 안정된 생활을 위해 나
라를 개혁하고자 했다.

(위)거중기 (아래)수원 화성, 팔달문

셋! 서학과 천주교

정약용이 살던 당시 조선에는 중국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서양의 문물과 과학
기술, 천주교가 활발히 퍼져 나갔다. 이러한 서양의 학문을 ‘서학’이라고 불렀
다. 현실을 개혁하고자 했던 실학자들은 세 부류로 나뉘었다. 첫째는 서학이 해
롭다고 생각하는 부류였고, 둘째는 발전된 과학이나 기술은 받아들이지만 천
주교는 배격하는 부류였다. 마지막은 천주교를 포함한 서학의 모든 부분을 적
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부류였는데, 정약용 형제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이들
과 함께 사회를 변화시키려던 정조가 죽자, 권력을 가지고 있던 무리들은 조상
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 등 성리학의 질서에 반대되는 천주교를 탄압하였다. 하
지만 그들의 숨은 의도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고, 새로운 시대를 꿈꾸는 학자들
을 몰아내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정약용은 그 당시에 천주교를 더 이상 믿지
않고 있었음에도 모진 고문을 받고 유배를 떠나야만 했다.

한국 천주교 최초의 신부이자 순교자인 김대건 신부 인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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