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 - Why? 피플 No.31 /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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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고통받는 민중이 아우성치고
인물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던, 조선 후기

정약용이 백성들을 위해 헌신했던 조선 후기는 개혁과 급변의 시대였
정약용의 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가 드러난 데
시대는 다, 끊임없는 당파 싸움으로 사회는 점점 혼란에 빠지고 백성들의
어땠을까? 삶은 궁핍해져만 갔다. 결국 가난하고 핍박받는 백성들은 봉기를

일으켰으며, 마을을 떠나 산적이 되기도 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실생활에 유용한 학문인 실학이 등장했고 서양의 앞선 문물과 과학 기술이 유
입되었다. 정약용의 삶은 이 모든 것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는 행정가로서 백성
을 위한 정치를 펼쳤고, 학자로서 세상을 바꿀 학문을 연구했으며, 당파 싸움의
희생자로 18년간 유배 생활을 했다. 신분 차별이 없는 평등한 세상을 꿈꿨던 정
약용은 쉬지 않고 문학과 학문의 길을 걸어간 대학자이자 개혁가로, 우리 역사
상 가장 위대한 스승이었다.

하나! 당쟁과 삼정 문란

영조가 당쟁을 줄이기 위한 탕평책의 결심과 당쟁, 즉 당파 싸움은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 나라의 발전을 위
의지를 다지기 위해서 세운 탕평비 해 편을 나눠 싸우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당쟁은 백
성의 현실을 무시한 채 오직 권력 싸움에 집중하는 쪽으로 변했고, 권
력을 쥐면 반대편을 죽이거나 귀향을 보내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런 현
실에 백성의 삶은 하루하루가 고달팠다. 당시 조선은 나라의 살림을 튼
튼히 하고 가난한 백성을 구하기 위해 세 가지 정책을 펼쳤다. 땅을 소
유한 자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전정’, 국방의 의무가 있는 나이의 남자
에게 군포를 징수하는 ‘군정’, 먹을 것이 없는 봄에 백성에게 곡식을 빌
려주고 가을에 추수하면 약간의 이자를 붙여 돌려받는 ‘환곡’이 있다.
이를 ‘삼정’이라 불렀는데, 정작 지방의 관리들은 아기에게 군포를 징수
하거나 환곡에 몇 배의 이자를 붙이는 등 멋대로 제도를 악용했다. 어
릴 때부터 백성의 힘든 삶을 보며 자란 정약용은 곡산 지방관, 암행어
사, 형조 참의 등을 역임하며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를 지지하던 정조가 죽자 곧바로 반대파의 모함을 받아 18년
간 유배 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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